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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감염병] 유럽의 교육

 

 

최고의 칭찬과 악담을 남긴 <유럽의 교육>


<유럽의 교육>은 공군 조종사이자 외교관이며 작가였던 로맹 가리가 30세이던 1944년 영국에서 출판한 첫 책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 공군 조종사로 참전하면서 밤에 썼단다. 한 편 한 편이 아름답고 훌륭해서 장 폴 사르트르는 ‘최고의 레지스탕스 소설’이라고 했다는데 많은 비평가가 단 한 권의 책의 저자로 그칠 거라고, 두 번 다시 <유럽의 교육>과 같은 수준 높은 작품을 쓰지 못할 거라고 했단다. 최고의 칭찬인 듯 최고의 악담이다.


<유럽의 교육>의 주인공은 열네 살 야네크다. 형 둘이 전사하자 의사인 그의 아버지는 숲에 구덩이를 파고 은신처를 만들어 야네크를 머물게 한다. 그러고는 독일군이 진주해 있는 마을로 돌아간다. ‘아버지는 왜 숨지 않느냐’는 야네크의 물음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마을에 환자가 많거든. 티푸스(typhus) 말이야. 기근이 들면 전염병이 기승을 부리는 법이지. 나는 그들과 함께 있어야 한단다. 이해하겠지? 엄마와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마을엔 절대 오지 마라. 네가 가진 식량이면 몇 달은 버틸 수 있어. 먹을 게 떨어지거나 견딜 수 없이 외로워지거든 그때는 빨치산을 찾아가거라. 체념하고 함부로 굴면 안 된다. 늘 반듯해라. 엄마가 가르친 대로 따르거라.” 이 부분을 읽자니 내 아들 생각이 난다. 내 아들에게 해줄 말도 이와 같다.


작품엔 항독 전쟁과 관련된 많은 사연이 있고 질병도 있다. 결핵으로 죽는 특급 호텔 주인의 아들, 늘 설사를 하면서도 산을 떠나지 못하고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죽음을 선택한 변호사, 연인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지는 폐렴을 앓는 장교, 매독을 걱정하는 소녀와 병사들…. 생존과 죽음에 대한 걱정보다는 전쟁 중인데도 불구하고 남겨야 할 그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사람들. 문학과 음악과 인간의 선의가 책 속에 담겨 있다.


로맹 가리는 비평가들의 악담을 받았음에도 1956년에 <하늘의 뿌리>로 공쿠르상(Le Prix de Goncourt)을, 1975년에는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자기 앞의 생>을 발표하고 두 번째 공쿠르상을 받는다. 나는 이 작가의 <자기 앞의 생>도 훌륭하다고 생각하는데 이 책은 연명의료나 성소수자에 대한 교육의 참고서가 될 만하다.

 


책 속에 담긴 질병 ‘장티푸스’


1980년 로맹 가리가 자살하기 몇 개월 전에 캐나다 라디오 프로그램과 한 대담이 책으로 나온 것이 <내 삶의 의미>인데 1940년에 공군 조종사로 있을 때 장티푸스를 앓다가 종부성사(임박한 죽음을 앞두고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로마 가톨릭 의식)까지 받고 나서 살아난 이야기가 있다. “이동하는 동안 사리르 강물을 마셨는데 예방접종을 하지 않은 탓에 장출혈을 동반한 장티푸스에 걸린 채 이집트 다마스에 도착했습니다. 나는 종부성사까지 받았습니다. 생존 확률이 1000분의 일도 안 된다고 의사들이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의사들은 내가 죽을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어느 순간 잠깐 의식이 돌아와 보니 내 옆에는 이미 관이 놓여 있었습니다. 나를 관 속에 넣고, 종부성사할 준비를 하고 있더군요. 신부가 종부성사용 자줏빛 제의를 입고 손에 십자가를 든 채 성사를 거행하려고 제게 다가왔습니다. 악마의 출현 같은 그 모습에 질겁해 그랬는지 격분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마지막 힘을 다해 십자가상을 잡아채 그걸로 신부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죠. 그때 나는 정신착란을 일으키고 있었고, 열이 41℃까지 올랐고, 사방에서 피가 흘러 수혈을 받고 있었는데 군의관은 내가 살아난 게 마지막 힘을 다한 그 에너지 폭발 덕이었다고 하더군요.” 장출혈이 동반된 장티푸스는 이런 병이다. 항생제도 없던 시절에 6개월간 입원했다가 겨우 살았다고 한다.


2022년 1월 들어 코로나19는 오미크론이 유행하면서 중증도가 낮아졌다. 코로나19 중증환자 치료 병동이 조금씩 비어가고, 내 당직 횟수도 당직 의사가 늘면서 줄었다. 당직하는 동안 겪은 특별한 경험들은 언젠가는 잊히겠지만 삶의 마지막 대화일지도 모를 상황에서 환자들과 나눈 대화는 오랫동안 기억 속에 남을 것이다. 허연 방호복을 입고 들어온 의사가 혹시 모르니 중요한 얘기를 가족과 나누라고 할 때 다들 어땠던가? 가족들과의 전화는 거절하고 단체 채팅방에 글을 남겼다고 한 분, 전화도 문자도 거절하고 깨끗하게 가겠다고 한 분, ‘죽을 수 있다’는 말이냐고 묻고는 악수를 청하고 꼭 깨워달라고 한 분, 많이 살았으니 이만하면 됐다고 한 분, 여자 친구와의 전화를 부탁한 분. 거꾸로 내가 그런 말을 듣는다면 뭐라 할지 생각해보는 날도 많았다.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언젠가는 닥칠 일이다. 야네크의 아버지는 좋은 말을 남겼고 의롭게 죽었다.

 

 

글 감염내과 최영화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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